2012년 7월 5일 목요일

일년의 여름. 그 시작




나는 육로로 여행을 다니는게 좋다고 어느순간부터 정해져있었다.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아시아를 돌아 다니면서도 나는 제대로 국경을 넘어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몇번의 여행을 출발하고 이제는 어딘가를 가게 되면서 몇번이나 가게 되는 나라들이 생기게 되던 즈음 지구본을 빙글 빙글 돌려 보던 중 재미있는 부분을 찾아냈다. 
러시아에서 알래스카까지 직선거리 80여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베링해협이다.
 ‘만약 러시아를 가로질러서 저길 건너면 미대륙까지 육로로 갈 수 있겠는데?’
(실제로는 바다를 건너야 하니 육로라고까지 하기는 어렵지만 지구의 멘틀위에 붙어 있다는 다는 커다란틀이라고 생각했다) 라는 생각이 ‘일년의 여행’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블라디 보스톡까지의 배는 얼마든지 많이 있으니 러시아로의 길은 크게 문제 될것이 없다.
문제는 블라디 보스톡에서 베링해까지 가는 길이다.
러시아의 북부로 가게 되면서 광활한 타이가 지역을 지나는것이 큰일이다.
4wd차량이 있다고는 해도 한대의 차량으로 그곳을 지나는것은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다.
함께할 사람들을 구하는것이 좋을것 같은 생각에 여행 사이트에 계획을 올린다.
이런 저런 염려의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내가 출발을 하려는 여름의 타이가는 군데 군데 커다란 물 웅덩이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그곳을 제대로 이해하는 현지 전문가가 없다면 불가능 할거란 글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건 타이가가 끝나면서 나타날 영구동토 툰드라 지역이다.
여름이기 대문에 얼어죽을만큼의 추위가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길이 전혀 없는 자연그대로의 상태를 달린다는것은 너무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몇가지의 고민들로 머리를 싸맨지 몇일째 보다 더 큰 좌절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베링해협의 러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에는 육로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출입국 사무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에 자문을 구하는동안 초반에 자문을 구했던 러시아사진작가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nom(제 이름입니다.)! 지금까지 베링해협을 여행자로 건넌 사람은 세명이래 그 중에 두명은 구속이 되었다네 한명은 구속은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방향이 다르다는것 같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두명은 구속이 되었고 미국에서 러시아로 넘어온 한명이 구속이 되지 않았다는것 같아. "

모험을 즐기지 않는건 아니다. 어려운 상황도 얼마든지 있었다.
힘든일이라는것에 대해서 포기할 마음은 없지만 국경이 없다는 말에는 더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북미와 중미를 지나 남미의 끝까지 지구를 세로방향으로 지나가는것에 대한 꿈으로 가득차있다.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향했던 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본적이 없는것은 아니니 툰드라까지
그리고 반대편 동토로 여행을 두번에 나눠 하는건 어떨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 내 머릿속은 이미 미 대륙에 있다. 


나의 가장 큰 후원자인 jjals에게 말을 한다.

 ‘ 나 아무래도 알래스카로 가야 할것 같아..’

 ‘ 이번엔 얼마나 가려고?’

 ‘ 그렇게 길지 않을꺼야.’

 ‘ 가야지 오빠가 가고싶으면.’

늘 너무 고마운 친구다. 물론 정말 이 여정을 준비할때만 해도 이렇게나 길어질거란 생각을 하진 못했다.
어떤식으로 이동을 하게 될지 어디를 거쳐서 갈지 혹은 어디를 갈지를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어느정도인가 하면 내가 종착지라고 생각했던 우수아이아를 그당시 일기에는 우수야로 적어두었다.
좀처럼 다시 읽지 않는 일기를 다시 읽으며(보통은 그렇다 일기란건 다시 읽기 위해서라기 보단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수야가 뭐지 ? 라고 고개를 갸우뚱 했으니 말이다. 

알래스카로 출발하기 전날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이제야 비로서 나는 짐을 꾸리기 시작한다.
딱히 애를 먹지는 않는다.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내 짐들은 가방속에서 나를 기다리고있다.
반들반들해진 카메라와 렌즈들, 무겁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맥북프로, 다이어트를 한껏한  삼각대와 아이폰은 당연하다.
여행의 짐을 꾸리는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의 경우엔 이것들이 전부다. 

카메라
d700/ mbd700
24-70 / 70-200
충전기/베터리4
aa홀더
cf메모리16x3
삼각대/헤드
sb900

맥북프로
아이폰/충전기
수첩/볼펜

반팔티2
얇은 긴팔티1
윈드브레이커1
긴바지1
반바지1
속옷3
양말3 얇은등산용


위생용품
칫솔/치약/비누/샴푸/로션/바디로션/바디클렌져
상비약



지갑용품
여권/fake지갑/visa카드/master카드/직불카드/city카드/

더 많이 가져가든 더 적게 가져가든 여행에서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행가방은 어차피 하나이고 그 하나의 가방은 어떤식으로든 나를 따라오는 친구가 된다. 
익숙한 가방에 손에 익숙한 당연한 물건들을 넣는다는건 여행을 하는것만큼이나 자신을 알아가는 길이다.






2010년 8월 31일 화요일

8월31일 오후 11:09 벨리스.

벨리스로 들어오는 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사실 어려운 길이 있다는게 이상한거지만 말이다.

체뚜말에서 10분이 좀 넘게 달려가면 벨리즈 북부 국경이 나온다.

국경이라기 보다는 시골마을의 체크포인트 처럼 생긴 그곳은 국경의 직원과 농담을 주고 받을 수도 있고

오토바이를 타고 넘어가며 국경직원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런곳이다.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이미그레이션을 하는 건물로 들어가 여권과 함께 내 정보를 적어서 50usd를 주면

그걸로 그만이다. 차를 타고 넘기 위해서는 여권에 비자를 받은 후에 customer 라고 적힌 곳으로 가면

비자 뒷장에 다시 작은 도장을 찍어 주는데 돈을 따로 받지는 않는다.

다만 벨리스에서는 벨리스 보험이 없으면 500usd의 벌금을 물게 되기때문에 보험료를 꼭 내야 한다.

실제로 벨리스 시티로 가는 길에 세명의 건장한 흑인 경찰은 내 차를 멈춰 세웠고 제일 먼저 보험증서를 요구했다.

모든 서류가 완벽하다는것을 알고 난 후에 내 차를 뒤져 프리존에서 산 담배 두 보루의 퍼밋이 없다며 낮은 휘파람까지

불며 나에게 에스코트를 받아 경찰서 까지 갈것을 요구했다.

깐꾼에서 안전벨트를 메지 않았다며 나를 멈춰 세운 경찰들이 나에게 팁을 요구한지 하루만에 생긴 일이다.

물론 깐꾼에서는 좋게 잘 넘어갔지만 이친구들 표정은 굉장히 진지하다.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차를 세우는 순간부터 어느정도 예상을 했던 터이고 창문을 열기가 무섭게 소리부터 크게

내지르는 녀석들이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다. 어쨋든 내가 잘못한건 아무것도 없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잔뜩 화를 내 버렸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담배에 대해선 눈감아 주겠다며 자리를 조용히 떠났다.

보험을 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마구 드는 순간이었다.

보험은 멕시코 국경을 나오면서 몇개의 브로커들이 있다. 하지만 제일 저렴한곳은 국경을 지나와서 하얀색 2층

건물에 있는 곳이다. 하루보험 료는 12 bzd (6usd)다.

벨리스와 멕시코 사이에는 free zone이라는것이 있다. 보통 입장료는 무료지만 차를 가지고 갈경우에는 10페소를

받는다.

텍스프리존 이기 때문에 벨리스로 들어가는 입국 도장을 받은 이후에는 프리존 입장이 불가능 하다.

현지인들에게는 어떤식으로 보여질 지 모르지만 한국인에게는 담배와 술을 제외하면 다른 물품들은 그닥 저렴하지도

또 살만큼 매력적이지도 않은 곳이다.

하지만 담배가 필요하다면 꼭 들러볼만 하다. 럭키스트라이크 오리지날 한보루가 11usd .

벨리스 시티로 가는 길이 좀 이상하다 싶은 순간이 있었다. 분명 하이웨이라고 들었는데 길은 엉망진창이고 양옆은

사탕 수수가 가득하다. 오가는 통행량도 10여분 동안 단한대도 없었다.

왠지 이길은 아니라는 생각에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차를 붙잡아 물어보니 그 길을 따라가도 벨리즈 시티가 나오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좋지 않은 길이 계속 될것이라 했다. 그럼 좋은 길은? 이라는 말에 뒤로 10분쯤 돌아가면

하이웨이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표지판도 있을거란다.

그럼 이길은 뭔데? sugar way.. 사탕수수를 기르는 회사가 만들어 둔 길이라고 한다.

벨리스 시티로 오는 동안 제대로 된 이정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10분을 돌아가서 정션이 나왓을때도

제대로 된 표지판은 역시 없었다.

인구가 400만이 좀 안되는 벨리즈는 생필품의 거의 전부를 수입에 의존한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지는 꽤 되었지만

과테말라가 영국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통에 과테말라라면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 설레 저을

정도였다.

sea side guesthouse 는 덩~ 에 위치하고 있다. 벨리즈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슬랭언어인데 downtown이란

말이란다. 처음에 이 말이 무슨말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어 한참을 헤맨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베어나온다.

2010년 8월 21일 토요일

2010년 8월 20일 금요일

칸쿤 도착

여행을 시작하고 한참만에 온라인에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글을 쓴다는건 확실히 어떤 모티베이션을 강하게 필요로 한다.
웹에 글을 쓰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혹은 불특정 다수에게 포스팅 한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보여주는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내스스로에게 향하는 문제다.

깐꾼에 도착을 했다.
가는길이 내가 향하는 남쪽과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될것이라고 늘 생각했던 곳이지만
길과 사람은 미리 판단하지 말라 했던것처럼 이곳까지 흘러 오게 됬다.

저렴하다 들어왔던 뚤룸의 숙소가 생각 외로 비쌌던 것도 깐꾼으로의 길을 제촉한 또하나의 이유다.

8월20일 오전 3:33 칸쿤.

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깐꾼에 도착했다.

저렴하다고 생각했던 툴룸의 생각보다 너무 비싼 물가에 놀라 이곳으로 왔고 역시나 생각보다 저렴한 물가에

다시한번 놀라고 있다.

깐꾼은 마치 제주도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바닷가로 가는 길은 커다란 호텔들이 전부 소유하고 있고

일반인들을 위한 통로는 작게 작게 만들어져있다.

호텔조나. 라는 지역이 만들어져있고 깐꾼으로 오는 길에는 maya를 갖다 붙인 수없이 많은 게다가 굉장히 비싸보이는

호텔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지금 묵고 있는 호스텔은 프라이빗룸이 350.. 400이나 하는 툴룸의 프라이빗룸에 비해 깨끗하고 시설도 훨씬 좋다.

깐꾼쉼터라는 곳이 있기에 다음카페에 가입까지하고 가격을 보니 1인50불 2인80불이란다.

쉼터라기엔 너무 비싼 가격이다. 물론 시설이 꽤 좋은것은 알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요즘은 밤에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낮이 너무 덥기때문에 몸이 지쳐있는것도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늦게 잠이든다.

머릿속이 복잡한것도 이유다. 참말로 복잡하다.

또 뭐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복잡할 일도 없다.

2010년 4월 9일 금요일

nom 인도를 보다

가장 좋았던 나라가 어디야?

여행을 많이 다니는 내가 제일 많이 받는 질문중 하나다. 카메라 사야 되는데 어떤걸 사야되? 와 거의 비슷할만큼 듣게 된다.
많이 듣는질문이라는건 대답도 바로 나온다. 그리고 대답을 하기 위한 추임새와 타이밍도 이제는 제대로 알고있다.

사진을 찍으면서는 나에게 티벳 그리고 여행자로서 나에게 인도.

몇번이나 인도를 다녀왔지만 여전히 나에게 인도는 언제나 그립고 말을 하기가 점점 조심스러워져 가는 그런곳이 되어간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있고 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끝도 없는 무질서로 밖에 보이질 않는 그들만의 법칙속에서
살아간다. 인도라는 토양속에서는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물고기들도 크게 자라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천혜의 환경에서도
그들은 가난하기만한 삶을 살아간다.
그곳에서 나는 끈적해진 손바닥이 즐거워지고 마살라향이 이끄는 곳으로 흐느적 흐느적 걸어가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nom 인도를 보다. 시작합니다





싸이클릭샤는 인도에서도 가장 하층민들이 가지는 직업중 하나다. 주1) 좀 더 오래전에는 핸드릭샤를 더 많이 사용했을테지만 그리고 점점 오토릭샤들이 많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큰 도시들이 아닌 작은 도시에는 여전히 싸이클릭샤는 인도를 대표할법한 운송수단이자 하나의 직업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처음 인도에 도착했을때 사이클릭샤를 타는게 쉬운일은 아니었다. 내 앞에 근사하게 생긴 인도남자가 굉장히 너저분한 옷을 입고 다 떨어져가는 샌달을 밟아 나를 어딘가로 옮겨주는 모습은 뭔가 세계평화에 어긋나는 기분이고 마치 내가 아잔타시절의 부잣집 첩실의 자식이나 된것같은 느낌을 갖게 해주곤 하니 말이다.
허우대는 멀쩡하더라도 보통의 인도인들은 나에비해서도 힘도 약하고 말그데로 비실비실한 편이다. 그런 뒤에 카메라 들고 앉아 다리꼬고 느긋하게 바람을 가르는 손을 느낄만한 깜냥은 내게 없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몇차례나 인도를 찾으면서 그들이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는지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고 지나가다 만나게 되는 짜이장수꼬마에게 1루피를 주고 릭샤왈라와 짜이한잔을 나눠먹을줄도 알게되었긴하다. 하지만 여전히 마더테레사 수녀님이 계시던 캘커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핸드릭샤는 좌불안석이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좁쌀만한 소갈머리 어딜가겠는가.

릭샤왈라들에게 릭샤는 그들의 모든것이다. 릭샤위에서 잠을자고 릭샤위에서 밥을 먹고 릭샤위에서 먹기위한 돈을 벌고 그리고 인도어딘가에있는 가족들에게 보내기 위한 돈을 모으게 해주는것도 릭샤다. 비틀즈의 방문이후 엄청나게 늘어난 인도여행자들 덕분에 인도엔 신흥부자들이 꽤 많다. 게중엔 눈치빠르고 수완좋게도 금새 돈을 모아서 여러가지로 불편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인도인들도 많이 있지만 보통의 그들은 꽤나 성실하게 가족을 부양한다.




인도인들은 잘생겼다. 그리고 예쁘다. 헐리웃영화의 어딘가쯤에서 언뜻 얼굴이라도 보았을법한이들이 인도에선 거지다. 우즈베키스탄에가면 김태희가 밭매고 있다는 말과는 좀 다른의미지만 확실히 인도인들은 잘생겼다.
이사진은 2005년에 ‘이 nom의 인도전’ 포스터에 썼던 사진이다. 나에게 인도를 가장 리마인드 시켜주는 사진중 하나다. 첫번째 개인전이었고 혼자 편집하고 사진뽑아내고 액자만들고 하면서 한동안 뚝딱 거리면서 준비한 전시회였지만 결과는 뭐 참패였다. 덕분에 아직 이사진으로 만든 엽서가 꽤 남아있다. 단돈 천원에 모셨는데 말이지 궁시렁궁시렁..




인도의 도로는 그야말로 혼돈 그자체다. 여기저기에서 울리는 목쉰 경적소리 그리고 차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의 송아지들 힌두교는 송아지를 성스러운 동물로 여기기 때문에 소가 무엇을 하든 그저 내버려둔다. 소얘기는 좀있다 더 하기로 하자.
다시 도로로 돌아와서 처음 인도에서 엄청나게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나곤 했다. 도대체 왜이렇게 울려대는건지 그리고 저렇게까지 애절하게 쉰목소리 높여서 울려대는 경적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길을 가는 운전자 보행자 송아지들을 보면서 도무지 인도라는 나라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처음 도착했던곳이 수도인 델리인걸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서울 한복판에서 어떤 운전자가 저런식으로 경적을 울려대며 운전을 했다면 아마도 한시간도 못되서 경찰이 달려와 잡아갔을게 뻔하다는 생각을 마구 해대며 경적소리에 온갖 불만을 털때즈음 차 뒤에 ‘HORN PLZ’ 라는 글귀를 보게 됬다.
이건 도대체 뭘까.. 영어가 통하는 호텔직원에게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도이고 나는 장기여행자다 여인숙을 생각하는편이 좋다. 어쨋든 호텔직원에게 사진까지 들이밀며 물었다.
인도에는 타타스모라는 거대한 자동차기업이 있다. 언뜻 일본인이 회장님이 아닐까 싶은 이름이지만 그것까진 알 수 없고, 인도의 물가가 아무리 저렴하고 인력이 저렴한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공산품의 가격까지 저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공산품이 가지게 되는 최소한의 재료비는 어찌되었든 소비자가격에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언젠가 뉴스에도 나왔지만 최대한 옵션을 빼내서 인도의 국민들이 살수 있을정도의 가격대의 자동차를 만들어 낸곳이 타타스모다.
사정이 이렇고보니 에어컨이나 라디오는 물론이고 사이드미러까지도 옵션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 더럽게 더운 나라에서 에어컨 없는것도 죽겠는데 라디오야 그렇다 치고 사이드미러까지 옵션이라니 보통의 상식으론 이해가 되질 않지만 어쩌겠는가 인도다. 그래서 사이드 미러 없는 자동차들은 뒷차가 있는지 없는지 따위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뒷차가 미친듯이 울려대는 경적소리는 앞차에게는 고마운 소리가 되는 재미있다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생겨나게 된것이다.
인도에서 택시를 탈일은 많지 않지만 오토릭샤를 타게되면 끊임없이 목쉰경적소리를 울려대며 달려가는 옐로우캡 오토릭샤는 그 소음의 주범격이고 말이다. 우리나라였다면 아주 저렴한 사이드미러를 만들어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지금에와서는 달짝한 마살라향과 먼지가득한 하늘과 함께 귀가득 들리는 경적소리는 내가 지금 인도에 있다는걸 알려주는 사인이 되었으니 불만은 없다.








인도의 여자들은 예쁘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그 아름다움이 빠르게 사라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아름답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여행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돈을 버는 방법도 제대로 알려줬다. 동네아이들이 졸졸 따라오면서 ‘one roopy’를 외치는건 귀엽긴 하다. 하지만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내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은 나에게 셔터 숫자까지 세는 치밀함을 보여주던 악덕 동업자 꼬마녀석이 외치는 20루피!! 는 차라리 슬프기까지 하다.
즉석에서 흥정을 한다. 비싸다 게다가 나에게 필요한 사진은 한장뿐이다. 나에게 정말 중요한건 이 한장 뿐이니 그렇게 비싸게 못주겠다. 물론 그녀에게 경외심이 없었던것은 아니다. 그녀는 정당한 노동을 했고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나에게 요구했을 뿐이지만 뻔뻔할만치 당당한 비용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인도인에게는 가트가 있다. 작은 호수도시 푸시카르는 3대 히피의 성지이기도 하고 가트의 도시이기도 하다. 가트라는건 물과 맞닿은 계단을 말 한다. 보통은 사원과 연결이 되어있지만 호수가에 자리잡은 도시이고 보면 집 뒷마당이랑 연결되어있기도 하다. 사진을 보면서 나는 어째서 저들의 피부느낌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손바닥이 끈적해지는 느낌.. 하지만 결코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끈적함이다. 나는 그 끈적함을 사랑한다.
끈적한 손바닥에 관련된 에피소드.
인도인들이 왼손으로 대변후 일처리를 하는건 많이들 알고 있다. 그래서 인도 화장실에는 1l가 조금 안될것같은 사이즈의 물통이 놓여져있다. 뒷처리를 하고 그 물로 손을 씻는다. 는것이 프로세스.
하지만 손바닥이 꽤 건조한 그들과는달리 내 손은 끈적하다. 그래서 뒷처리후에 아무리 손을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는것 같은 느낌이 남는다.
내가 사랑하는 끈적함은 화장실에 갈때마다 비누를 들고가게 만들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여전히 그 끈적함을 사랑한다.







원숭이는 정말 귀찮고 나쁘다.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 하지만 인도의 수없이 많은 신들중에 나는 하누만을 굉장히 좋아 한다. 서유기의 손오공의 모티브였던만큼 그는 원숭이다.
하누만의 이야기 하나
전쟁이 있던 중이었다. 하누만은 자신의 병사들이 부상당한 모습을 보고 아파한다.
그래서 주변의 사두를 찾아가 병사들의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를 묻는다.
끽끽~ 우끽끽 이라고 하진 않았겠지만 그의 모습을 보면 왠지 그랬을 것도 같다.
사두는 약초의 모습을 설명해주고 그것이 있는 산의 위치도 알려준다.
하누만은 구름을타고 그 산으로 당장에 날아가 약초를 뒤적여보지만 풀이나 약초나 비슷하다.
결국 하누만은 그 산을 통째로 떠서 전장으로 돌아왔고 사두는 그 약초로 병사들을 치료했다는 이야기.





하누만은 신이지만 약초는 구분할 줄 모른다. 인도의 신은 다 이런식이다.
물론 자신의 성기를 끌어안고 한달동안 춤을춰서 근방 모든여자들을 임신시켰다는 시바는 좀 다르지만 말이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도 제우스를 제외한다면 그들은 무엇인가가 결여되어있다. 그 결여됨은 그 신의 아이덴터티를 만든다. 제우스가 바람둥이인것도 왠지 비슷하다.
언제나 듣게 되고 생각하게 되는 식상한 이야기지만, 여전히 어디에나있는 신들의 비슷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재미있다.

다시 원숭이로 돌아오자.
어느나라에서든 원숭이는 나를 귀찮게구는 정말 싫은 녀석이다. 세렝게티에서 블루멍키는 나의 소중한 과자를 가져가셨고, 인도에서의 원숭이도 자꾸만 내 과자를 탐했다. 그래도 세렝게티의 블루멍키는 fire egg가 푸른색이라 볼거리라도 제공해주었지만 주2)




방앞에 이런녀석이 기웃거리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좀 많이 달라진다. 여행 순서데로 글을 써달란 부탁을 받았기때문에 좀더 나중에 나와야 바라나시의 사진이지만 원숭이이야기라면 이녀석을 빼놓고는 절대로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미리 데려왔다.
이녀석의 별명은 eveil monkey. 단순히 피부병이 있는 녀석이긴 하지만 내 방에서 몇번 ‘half and half’ 주3)를 훔쳐간 이후로는 늘 저런식으로 내 방 창문 아래에 대기 하고 계신다. 뒤에 다소곳한척 앉아 있지만 보통은 악마원숭이는 과시용일뿐 행동을 주로 하는 녀석의 와이프는 더 얄밉다. 내가 악마원숭이를 무서워한다는것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다는듯한 느낌으로 날 관망하곤 했으니 말이다.

참 고민스럽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바라나시의 내 숙소 주4) 저 방은 내가 바라나시를 찾을 때마다 묵는 굉장한 명당이다. 지금은 개보수 되서 예전 모습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그 방앞에 저리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인간으로 치면 왠지 창자꺼내서 줄넘기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것 같은 녀석이라니.. 왠지 싸워도 내가 질것같다. 하하하핫...

어찌되었든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원숭이가 참 싫다. 하지만 인도는 원숭이가 참 많다. 그러니 신이 나왔겠지만..
원숭이 옆을 지나는건 어릴적 동네 사나운 개xx옆을 지나는것만큼이나 긴장되고 불편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종류의 일이다. 이럴때 생기는 끈적함은 좋아 할 수가 없다.

요즘은 일본원숭이들이 독도도 탐하고 있다. 주5) 딱히 요즈음의 일만은 아니지만.. 원숭이는 탐욕스럽다.








푸시카르에서 서쪽으로 좀더 가면 자이살메르라는 곳이 있다. 인도에서 좀 더 라고는 해도 차로 하루는 꼬박 이동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자이살메르는 사막을 가지고 있는 도시다. 사진에 있는 사내는 그 사막에 여행을 왔던 미국 여자가 인도 남자를 만나 태어난 아이다. 엄마는 아이를 버리고 미국으로 돌아가버렸고, 버려지게되었다. 는 왠지 너무 뻔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셈이다.
사막을 도는 내내 그는 굉장히 성실한 사내였다. 내가 타고 다니던 낙타 킁킁이의 낙타몰이꾼이었는데 보통 인도 낙타몰이꾼들이 손님뒤에 함께 앉아서 가기도 하는것에 비해 그는 언제나 사막을 자신의 다리로 걸어다니는 사내였다.
가끔씩 나에게 노래 한곡을 불러주고 나는 그 답례로 2루피를 주곤 했다. 노래실력이 굉장히 뛰어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노래 자체가 썩 좋은 노래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겟지만 나는 그가 부르는 노래가 좋았고 그가 끌어주는 축농증 낙타 킁킁이가 퍽 좋았다.




































주1)

아리안족이 인도로 이주하면서 선주(先住) 민족을 정복하고 동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소위 카스트 제도라고 하는 특유한 사회제도가 발달했다. 바라문 또는 브라 만[神官], 크샤트리아[武士], 바이샤[庶民], 수드라[奴婢] 등의 4성(姓)으로 나누어지는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각기의 카스트에 속하며 결혼·직업 등은 동일한 카스트 내에서 행해진다.

브라만교 이후의 힌두교 제사(祭祀)는 브라만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행된다. 크샤트리아는 무사계급으로서 왕족이 여기에서 나왔다. 바이샤는 농목업(農牧業)·상업·수공업과 기타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서민계층으로, 후에 각 직종(職種)에 따라 2차 카스트가 생겼다. 카스트의 최하위는 수드라로서 대부분 피정복민으로 구성되었고, 상위 카스트의 노비(奴婢)로 종사한다.

4 성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아우트 카스트라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 생겨, 이들은 거주(居住)·직업 등에 엄격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간디는 이들을 신(神)의 아들이라 부르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독립 후 불가촉천민제를 폐지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그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장학금제도를 설치하고, 의석의 일부를 할당하기도 하였다. 헌법상 카스트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그나마 대도시에서는 점차로 차별이 해소되어가지만, 지방에서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있다 . 두산백과사전 발췌

그중 릭샤왈라는 가장천민인 수드라에 들어간다. 하지만 오토릭샤로 가면 상황이 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여전히 그들은 카스트에따라 살아가고 카스트에따라 고개를 숙이고 살아가고 있다.




주2)


살아오면서 이런 매콤한 매력을 가진 녀석은 처음봤다.
블루멍키라고 물리는 이유를 몇장의 사진을 찍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를 뒤로하고 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말 시원하게 한참을 웃어댔다.
세렝게티에서 보았던 녀석들중에 니가 최고다.






주3)
이미지를 찾는데는 실패했지만 하프앤 하프는 인도에서 꽤 팔리고 있는 과자다. 모양이나 맛은 오레오와 굉장히 비슷해서
가끔 당분이 부족해질때면 입에 달고 사는 과자다. 바라나시에 머물던 즈음의 나는 반반교를 믿을 정도로 좋아했었다.


주4)



인도의 그리운것들에게 순위를 매기자면 4위나 5위쯤에서 짜이와 100합을 겨뤄야 할 호텔 엘레나다.
원래는 성이었던것을 개조해서 호텔을 만들어 둔것인데 저곳은 마하라자와 마하리니(왕과 왕비)가 묵곤 햇던 방이다.
지금은 개보수가 진행되서 꽤 비싸졌다는데.. 갈때마다 올드프랜드 올드프라이스.. 를 외치던 유진이 아직 있다면
옛날 가격으로 방을 빌려줄지도 모르겠다...






주5)일본은 지난 4월7일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규정하고 교과서에 그 내용을 싣겠다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나는 분노한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올해 겨울은 쉽게 끝나질 않는다.

또 눈이 온다.
좀처럼 겨울이 지나가 주질 않는다. 몇번이고 눈이 오고 또 눈이오고 날이 따뜻해졌나 싶었다가
다시 눈이 온다.

몇번은 창문을 열어 두었다가 다시 닫아 두게 된다.
그리고 다시 몇번이나 환기를 시켜야 하고 혹은 궂이 환기를 위해서 창을 열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가
쉬이 창을 열지 못하게 되기를 반복한다.

담배는 화장실에서 혹은 베란다에서 피우기로 작정을 했다.
역시 날이 추우면 베란다로 나가는것도 쉽지 않다.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건 뭔가 편치 않다. 담배냄새는 얼마나 독하려고 작정을 한건지
환기구의 팬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게 될때까지 열심히 돌아가지만 냄새는 사라지질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 독한 냄새는 내 몸속에 가득히 남아 있을텐데 내게서 그 냄새가 어떻게 날지 궁금하다.


악취가 나는걸까?

겨울이라 좋았던 기억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누군가 만들어 둔 눈사람을 볼 수 있어서.. 따뜻한 집안에 틀어 박힐 수 있어서.. 여러가지 옷들을 겹쳐 입을 수가 있어서
역시 반반이다. 좋은 점은 의외로 좋은점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쪽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긴 하다.
확실히 좋았던 기억이 있긴 한것 같다.

아니 그보다 나는 겨울이 나쁘다는 생각을 하려고 한건 아닌데 말이지..
제목이라는건 생각보다 무서운 힘을 가지게 되는것 같다.

이야기를 계속 이어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기로 생각을 했지만 뭔가에 대한 불안감은 혹은 무엇인가 행해지는 순간에 느꼈던 일종의 ‘아픔’은
그 아픔 자체가 가진 힘보다 더 크게 상념과 상상력이 더해져 다음번 선택을 하게 되는 순간이 왔을때 반대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곤 한다.
이를테면 추우면 베란다에는 나가기가 싫어진다. 화장실에서 나게 될 담배 냄새때문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건 싫다.
하지만 내가 정한건 둘중 하나에서만 하기.
어느쪽이 좀 더 싫은가는 그때 그때 다르다. 하지만 확실히 기호라는게 생겨난다. 그런식의 습관들은 나에게도 좋은 습관은 아니다.

나를 제어할 수 있는 혹은 제한 할 수 있는 것들은 될 수 있는데로 만들지 않는게 좋지 않을까?

이것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겠다.

이야기가 다시 조금 변해서 흘러간다.
이런 상념들은 결국 쉽게 끝나주지 않는 겨울 탓이다. 사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와서 다음번 겨울을 기다릴때까지
늘 비슷한 혹은 거의 같은 패턴의 조금 다른 단어들의 나열들은 다시 상념이 되고 다시 나를 괴롭히거나 혹은 즐겁거나
하게 될것이란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조금은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지리한 겨울이 끝나고 조금은 얇은 옷을입은 내가 팔랑거리며 돌아다니게 될것을 말이다.